화병은 한국 한의계에서 가장 먼저 임상진료지침이 개발된 질환이다. 가장 최근 2021년 임상진료진료지침의 내용을 보면, ‘화병은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해소되지 못하여 화의 양상으로 폭발하는 증상이 있는 증후군’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미국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s) 제4판에서는 화병이 한국의 문화관련증후군(culture-bound syndrome)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화병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문화적으로 흔히 접해왔지만 진단이 가능한 병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이 많다. 동의대학교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권찬영 교수는 화병에 대한 한의학 기반 디지털융합기술 과제와 다학제적 연구를 통해서 디지털치료기기를 개발하고 화병 진단 및 치료의 표준화를 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MZ세대(2세대) 화병에 관심··· 사회적으로 만연된 화병에 대한 연구
경희대학교에서 한의학 박사를 취득 후 2020년부터 동의대학교 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진료과장으로 활동 중인 권찬영 교수는 화병&스트레스 센터를 열고 진료하고 있다. 권 교수가 화병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의 은사인 경희대학교 김종우 교수의 영향이 컸다. 김종우 교수는 처음 화병의 임상진료지침을 개발한 연구책임자이자, 동서신의학병원(현재 강동경희대학교병원)에 화병&스트레스 클리닉을 신설한 화병 진료의 권위자다. 권 교수는 그의 가르침으로 화병 연구 및 진료에 관심을 갖게 되어 부산에서 화병&스트레스 센터를 열고 진료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화병의 진단 방법으로 ‘화병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에서는 2004년 경희대학교와 고려대학교 연구진이 함께 개발한 화병면담검사(HBDIS)를 권고하고 있다. 이 도구를 통해 화병의 신체증상, 심리증상 등을 7가지 항목으로 구분해 환자를 평가하고, 진단기준에 충족되면 화병으로 진단할 수 있다. 또한, 한국 질병분류체계(KCD)에도 화병이 포함되어 있어, 화병은 한국 의료 시스템에서 인정되는 진단이 가능한 병이다.
화병이 발생하는 핵심 키워드는 ‘부당함’이다.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건에 대한 반응으로 화도 나고, 억울하고, 분하고, 부글부글 열도 오르며, 치밀어 오르는 것이 해결되지 않고 자리 잡은 것을 화병이라 할 수 있다. 최근 젊은 세대에서도 화병이라는 표현은 자주 등장한다고 권 교수는 말한다. 소위 말하는 MZ세대들은 ‘불공정’이나 ‘부당함’의 민감성이 매우 증가하였고, SNS 등으로 분노를 공유하며 그 감정이 증폭되기 때문에 화병에 더 취약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이러한 사회문제를 2세대 화병이라고 명명하고, 몇몇 키워드를 잡고 화병을 현대화하는 연구에 집중하고 있다. ‘불공정함과 화병’, ‘MZ 세대의 화병’, ‘화병과 자살 문제’, ‘화병의 생물학적 모델’, ‘감정노쇠와 화병’ 등의 연구 키워드로 가지고 접근하고 있다. 그는 최근 ‘MZ 세대에서는 화병이 얼마나 흔할까?’라는 연구질문으로 설문조사를 진행한 바 있다. 그 결과, 한국 MZ 세대에서 화병 유병률이 36%라는 놀라운 결과를 얻을 수 있었는데, 더 흥미로운 것은 화병이 진단이 가능한 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비율이 45%, 즉 절반도 못 미친다는 사실이었다. 즉, 화병이라는 용어는 젊은 세대에서도 만연해있는 정신건강 문제이지만, 정작 그것이 병이라는 것은 잘 모르고 있다는 격차(gap)를 확인할 수 있다.
한의학 기반 디지털융합기술 R&D 과제로
‘디지털 센싱 기반 적응형 화병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과제’ 연구
앞서 말한 것처럼, 화병은 오늘날에도 한국에서 흔한 정신장애지만 화병이 진단 및 치료가 필요한 질환임을 인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이유로, 국민 정신건강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러한 일종의 격차(gap)가 존재한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권찬영 교수는 말했다. 이러한 격차는 화병을 치료하는 한의사 입장에서도 발생된다. ‘화병 한의표준임상진료지침’에는 화병에 대한 치료 원칙으로, ‘근본 치료를 위해 상담을 포함한 정신 치료가 필요하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권 교수가 화병을 진료하는 임상 한의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본 결과 화병 치료에서 정신요법을 활용하지 않는 비율이 약 80%로 매우 높았고, 정신요법을 활용하지 않는 이유로 ‘활용할 시간의 부족’이 65%로 높았다. 즉 화병 치료에 정신요법이 꼭 필요하지만, 실제로 임상에서는 활용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디지털치료기기는 특히 정신요법에서 비용 대비 효율적이고, 시간에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널리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제가 개발하고 있는 화병 디지털치료기기가 이 격차를 좁혀, 결과적으로 한국 국민의 정신건강 개선에 기여하기를 기대하며 연구과제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권찬영 교수가 연구하고 있는 ‘디지털 센싱 기반 적응형 화병 디지털 치료기기 개발과제’는 화병을 치료하는 디지털 치료기기를 개발하는 과제이다. 권 교수는 환자들에게 처방할 수 있는 S/W를 접목하여 화병을 치료하는 스마트폰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디지털융합기술 R&D는 한의계 내에서 처음 시도되는 사업이기도 하다. 한의학의 과학화, 대중화, 산업화 등에 기여함과 동시에 국민 건강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목적을 가진 뜻깊은 연구다.
최근 국내에 디지털치료기기가 도입되면서 ‘디지털의료제품법’이라는 새로운 법령이 제정 및 시행되었다. 한의계에서 이러한 융합연구 사업은 첫발이기에 롤모델이 없다 보니, 디지털치료기기의 향후 평가와 인증 과정의 절차를 밟는 과정은 새로운 도전의 연속이 된다며, 걱정보다는 흥미와 재미를 찾으며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한의학의 기술이나 화병을 치료하는데 필요한 정신요법은 전산화·표준화 측면에서 부족한 측면이 많았는데, 연구 그 자체로도 한의학을 표준화·과학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고 있다. 화병 디지털치료기기를 통해 한국 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존재하는 분노 관련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K-디지털치료기기(K-DTx)로서 활용되었으면 바람도 있다. 부당함, 부당함에 대한 반응으로의 화, 그리고 화가 축적된 후에 나타나는 각종 심리적, 신체적 증상들에 대한 치료는 한국에서 특히 잘 해오던 것이지만, 다른 문화권에서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도 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한의학의 장점 중 하나인 다양한 치료기술과 공학 기술 간의 융합으로모빌리티 서비스나, 슬립테크 등에 K-콘텐츠로 접목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그다.
이 밖에도 권 교수는 진행하고 있는 몇 가지 연구 과제들이 있다. 첫 번째로 ‘한국의 높은 자살률 문제 해결에 한의사 인력이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라는 연구다. 해당 연구는 올해로 마무리할 예정이며 오는 9월 7일 공청회를 개최하여 연구결과를 공유할 계획이다. 두 번째로는 동의대학교 인공지능그랜드ICT연구센터의 세부과제 연구로, 의료기관 종사자의 정신건강 문제를 명상과 같은 심신요법을 활용한 ICT로 해결하기 위해 시도하는 연구다. 특히 간호사들의 정신건강과 감정노동에 관심을 갖고, 명상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해서 임상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세 번째로는 올해 8월부터 시작한 ‘센싱기술을 사용하여 한의학의 양생요법에서 강조하는 복식호흡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전산화’하는 연구다. 그는 운이 좋게도 동의대학교 인공지능그랜드ICT연구센터에서 AI나 공학 전문가들과 접할 기회가 생기면서 과제를 함께 진행하게 되었고, 참여기업도 매칭되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다양한 융합연구와 기업들과의 협업으로 2023 산학협력상 산학협력 우수교원으로 표창받은 바 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으로 삶의 모습을 이해하며, 환자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화병에 대한 인식도 조금씩 개선되어 가고 있어 최근에는 스스로 화병을 인지하고 내원하는 환자들이 많아지고 있다. 권찬영 교수가 화병 상담을 하다 보면, 환자들이 결국 화병으로부터 낫고 행복해지는 열쇠는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된다고 한다. 또한 권 교수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한 사람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환자를 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화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화병이 왜 발생했는지 알아야 하고, 화병이 발생한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삶의 모습을 들여다봐야 하죠. 마찬가지 이유로, 화병이 낫기 위해서는 삶의 모습을 바꿀 수 있는 자기돌봄이 중요합니다. 제 역할은 그들의 옆에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보조적인 도움을 드릴 뿐입니다.”
그는 강원도 양구군에서 공중보건의사로 활동할 때 의료인으로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당시 독거노인 어르신들에게 주 2회 방문진료를 했었는데, 무릎 관절염이 심해 걷지 못하시는 한 어르신에게 침을 놔드리는 순간보다, 휠체어 밀어 드리며 동네 한바퀴 도는 시간을 더 행복해했던 모습을 잊지 못한다. 의료인으로서 환자에게 무언가를 전하고 도움을 줄 때, ‘과정’ 역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배우게 된 경험이었다. 권 교수는 환자를 향한 의료서비스는 단순히 돈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물건이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라며, 한 사람이 살아온 삶과 한 사람이 살아온 삶이 만나는 가치 있는 과정을 오늘도 만들어나가고 있다.
모든 지식은 인류의 것, 다학제 융합연구로 꿈꾸는 건강한 내일
권찬영 교수의 네이버 블로그에는 ‘근거중심 한의학 정보의 보편화와 환자의 의료선택권 신장을 통해, 환자가 중심이 되는 한의학’이라는 문구가 씌여져 있다. 화병진료 통해 자연스럽게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권 교수는 근거중심의학(Evidence-Based Medicine, EBM)에도 관심을 가지고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Clinical expertise(임상의의 경험과 숙련도), Research evidence(연구를 통해 확인된 근거), Patients’ preference(환자의 선호나 가치) 체계를 갖춘 이상적인 진료를 꿈꿔왔다. 그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라는 신념을 가지고 매사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임하고 있다. 권 교수는 네이버 인플루언서로서 다양한 연구결과를 공유해왔고, 이를 본 R&D에 관심이 있는 기업들로부터 함께 연구개발을 하고 싶다는 제안을 받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권 교수는 부산시한의사회에서 학술이사와 함께 부산시 보건사업 중 하나인 치매예방사업을 돕고 있다. 또한 대한한방신경정신과학회의 학술이사와 홍보이사, 한국명상학회의 편집이사이자 학회지인 한국명상학회지의 편집위원장을 하고 있다. 대한약침학회의 학술이사, 그리고 학회지인 Journal of Pharmacopuncture와 Journal of Acupuncture and Meridian Studies의 부편집장, 한국한의학교육평가원의 학술위원회 위원으로도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제가 가지고 있는 한의학의 지식이 저 만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한의학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이 세계에 있는 모든 지식들은 우리 인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안전하게,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제도가 있고, 의료인 면허가 있을 뿐이죠. 연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같은 생각 때문에, 의료인으로서는 환자의 알 권리와 의료선택권에 대해서, 그리고 연구자로서는 다학제 융합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이 비약적으로 발전되는 시점에서, ‘콘텐츠’는 고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권찬영 교수는 한의학은 한국의 고유한 중요 자원이라는 인식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또한 한의학을 더 이상 고립된 분야가 아닌 다른 분야와 융합하며 연구를 기획하고 수행할 수 있는 사업이 많이 만들어진다면 시너지도 커질 것이라 말했다. 한의학이 진정으로 한의사 만의 것이 아니라 국민 모두의 것이 되었을 때 한방산업의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앞으로도 권 교수는 현재의 연구들과 진료를 열심히 이어나가겠다는 목표를 전했다. 더불어 ‘공유된 의사결정(shared decision making)’시스템을 가지고 한의 의료가 융합된, 환자 중심 병원을 꿈꾸고 있다. 마지막으로 권 교수는 연구에 집중할 수 있도록 지원해준 동의대학교와 동의의료원에게 감사를 표하며, 스스로도 튼튼한 조직을 만들어가는 일원이 될 수 있도록 도움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권찬영 교수가 꿈꾸는 환자중심의 다학제 융합연구를 통해 앞으로 전 세계적으로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