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인물 유지연 기자] 반도체 산업은 ‘첨단 산업의 쌀’로 불리며 기술 패권 전쟁의 중심에 서 있다. 지난 50여 년간 반도체 산업은 ‘절대 강자’ 없이 주도권을 뺏고 빼앗기는 싸움을 이어왔다. 최근에는 미국이 ‘반도체 굴기’를 선언한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칩4 동맹’을 결성하기도 했다. 재료와 소자, 애플리케이션을 고려한 융합연구를 수행해온 가천대학교 전자공학과 유호천 교수는 치열한 반도체 전쟁의 게임체인저가 될 새로운 반도체 소자를 찾고자 오늘도 고군분투하고 있다.
새로운 형태의 NDR 소자 고안해내며 고효율 차세대 회로소자 기술 개발에 성공
가천대학교 전자공학과 유호천 교수 연구팀이 최근 고효율 차세대 회로소자 기술 개발 소식을 알렸다.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 소재분석연구부 윤형중 박사 연구팀과의 공동연구 끝에 n형 반도체 물질인 산화아연의 나노입자 결정 구조를 조절해 p형 반도체 물질인 실리콘과 접합한 형태의 p-n 접합 NDR(음성미분저항) 반도체 소자를 구현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NDR은 고농도 p-n 접합에서 나타나는 양자 터널링 효과에 기인한 것으로 전압이 증가함에도 전류가 감소하는 독특한 현상을 칭한다. 전기를 인가하면 일정 수준의 전압에서는 전류가 감소하지만, 전압이 증가하면 다시 전류가 증가하게 된다. 이때 전류의 크기가 감소하는 구간이 NDR 영역이다. NDR은 특정 전압 조건에서 전기 신호의 힘을 조절할 수 있는 고유의 스위칭 특성을 이유로 차세대 전자회로 분야의 핵심 기술로 손꼽힌다.
지금까지 진행되어온 2차원 소재를 활용한 NDR 소자 개발은 대면적 제작이 어려운 데다 복잡한 제작 과정은 물론 초저온 환경을 요구하는 등 여러 한계가 따랐다. 이에 유 교수 연구팀은 산화아연과 실리콘을 접합한 형태의 NDR 소자를 고안해냈다. 산화아연 나노입자의 결정 크기를 조절함으로써 산화아연 내 실질적으로 에너지(전자)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인 에너지 밴드갭을 제어한 것은 물론 산화아연에서 실리콘으로 전자가 이동할 때 겪게 되는 내부 정위 장벽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로써 전압이 증가함에도 특정 구간에서 전류가 감소하는 NDR 현상 구현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번에 개발한 NDR 소자는 산화아연-실리콘 접합 과정에서 액체 상태로 박막을 코팅하는 용액 공정을 활용해 대면적으로 제작했기에 높은 균일도와 100% 수율의 높은 생산성을 확보한 것이 특징이다. 극저온 환경, 고진공 등 외부자극 없이도 소자의 전류 레벨을 마이크로 암페어 수준으로 향상시킨 점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성과다. 기존 소자의 전류 레벨 대비 1000배 이상 개선된 결과인 까닭이다. 유 교수 연구팀이 개발한 고효율 차세대 회로소자는 고성능 마이크로파 발진기, 증폭기는 물론 다중논리값 구현을 위한 고속 지능형 스위칭 소자 상용화에 속도를 더할 것으로 기대되며, 해당 연구 성과는 재료과학분야 국제학술지인 ‘어드밴드스 머티리얼즈 테크놀로지스’ 최신호 표지 논문으로 게재되었다.
반도체 재료와 소자, 회로를 고려한 융합적 연구로 반도체에 새로운 기능 부여
2021년 4월 유호천 교수 연구팀은 포항가속기연구소 이한구 박사 연구팀과 공동으로 단분자 이종접합 반도체 구조를 규명해냈다. P형 유기 단분자 DNTT와 N형 PTCDI-C13의 이종접합시 형성되는 분자배향성 및 에너지구조를 규명하고, 양극성 회로 및 3진 논리를 구현한 것이다. 해당 연구는 서로 다른 반도체가 접합할 때 화학적 또는 물리적 구조가 어떻게 변형되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기존 분석의 한계를 극복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향후 관련 기술 개발을 위한 중요한 가이드라인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같은 해 5월 광검출과 메모리 동작이 모두 가능한 플렉서블 이차원 반도체 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했다. 성균관대학교 신소재공학부 홍성인 박사, 김선국 교수 연구팀과의 공동연구로 RGB를 포함한 가시광선 빛을 모두 검출하는 메모리 소자를 개발하면서다. 1000번의 구부림 테스트에서 메모리 동작 안정성을 검증했다. 해당 연구는 디지털카메라의 핵심 소자인 포토다이오드와 메모리의 집적도 및 픽셀 사이즈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유 교수가 기존의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며 새로운 연구결과를 내기까지 반도체 재료부터 소자, 회로를 모두 고려한 융합적 연구가 유효했다. 그는 기존에 상용화된 반도체 소자와는 다른 특성을 지닌 소자를 개발함으로써 반도체에 새로운 기능을 부여하는데 초점을 맞춘 연구를 수행해왔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물리적 보안 코드를 생성하는 반도체 소자 개발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이른바 ‘반도체 지문’이다. 랜덤성을 가진 재료에 소자를 얹는 공정을 통해 소프트웨어 방식의 보안 코드가 아닌 하드웨어적·물리적 보안 코드는 생성한다면 해킹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착안했다는 설명이다. 또한, 수직적층 연구 등 새로운 기술을 산업에 적용하기 위한 연구도 수행한다. 유 교수는 연구의 수준을 개척하는 연구와 실질적인 산업화를 이루는 기술에 대한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의 트랜지스터들은 더 작고, 더 빠르게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방향성에서 벗어나 기존의 실리콘 기반이 아닌 새로운 반도체 소자를 발굴해 기존의 한계를 극복하는데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재료와 소자, 애플리케이션 모두를 고려해 새로운 반도체 소자를 개발하는 것이 목표죠.”
융합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한 확신으로 폭넓은 관점에서의 연구 이어가
지난해 8월 유호천 교수 연구팀은 캐나다 앨버타대학교 Manisha Gupta 교수팀과 함께 한국연구재단과 캐나다 Mitacs Global Research Intership Program이 추진하는 ‘과학기술국제화사업-이공계 대학원생 캐나다 연구 프로그램’에 선정되었다. 양측은 차세대 바이오 센서 굿현을 위한 첨단 기술을 공동 개발하며, 유 교수 연구팀 소속 나노과학기술융합학과 이동현, 서주형, 박태현 박사과정 학생은 전액 국비를 지원받아 각각 ‘광증폭형 자가조립 단분자층의 원격 도핑 효과 기반 고감도 바이오 센서’, ‘유기전기화학형 트랜지스터식 고성능 바이오 센서’, ‘다중 논리 회로 기반 유기전기 화학식 바이오센서’ 연구를 수행한다.
“PCR 등 화학적 반응을 활용한 검사법은 정확하긴 하지만 시간이 많이 걸리는 단점이 있었어요. 하지만 반도체 소자는 검사에 소요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이에 Manisha Gupta 교수가 수행해온 바이오센서 연구와 우리 연구실의 반도체 소자 연구를 접목해 고속 바이오 센싱 검출 기술을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캐나다 앨버타대학과의 공동연구는 유 교수가 평소 품어온 융합연구의 필요성에 대한 확신에서 기인한다. 그는 박사과정 당시 지도교수님의 영향으로 융합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유 교수가 몸담았던 연구실에서 회로 설계가 아닌 소자와 재료를 연구하는 것은 그가 유일했다. 유 교수는 반도체의 애플리케이션에 맞추어 회로를 설계하는 연구를 수행하며 시야를 넓힐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미국 노스웨스턴대학교 재료연구센터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하며 반도체 소자를 이루는 여러 물리적·화학적 재료들을 깊이 연구하며 재료에 대한 이해를 넓힌 그다.
“반도체 분야에서 흔히 하는 말이 공정을 하는 사람과 회로를 설계하는 사람 사이에 의견 조율이 어렵다는 점이에요. 서로의 영역을 잘 모르다 보니 의견 대립이 잦다는 거죠. 학생들에게 각각의 영역과 기술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반도체 제조과정을 아우를 수 있는 역량을 쌓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융합적 사고 이루어질 때 비로소 새로움 창출할 수 있어… 학생들과 함께 성장하는 연구자 될 것
현재까지도 유호천 교수는 재료와 소자, 애플리케이션 모두를 고려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방향성은 제자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그는 하나만을 보기보다 더 다양하게 고려하며 연구를 수행할 것을 주문한다. 유 교수가 이끄는 연구실 또한 전자공학과 출신뿐 아니라 화학공학과, 재료공학과 등 여러 학과 출신들이 어우러져 있다. 향후 기계공학과 등 다양한 분야의 학생들을 영입해 각자 다른 백그라운드와 전문성을 융합해 시너지를 창출한다는 구상이다. 유 교수는 타 대학, 타 과 교수님과의 공동연구 속에서 파트너에게 배우는 바가 크다며, 모르는 분야를 겁내기보다 공동연구 속에서 서로의 분야에 익숙해질 때 새로운 결과를 창출해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새로움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융합적 사고가 이루어질 때 자신만의 우물에 갇히지 않고 새로움을 바라볼 수 있어요. 각각의 분야에서 맞닥뜨린 문제점과 한계를 다른 분야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풀 수 있는 지점들이 매우 많거든요. 연구실 학생들이 넓게 보고,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보다는 공부하며 받아들이는 과정을 훈련할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융합에 대한 유 교수의 확신과 가르침은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11월 미국 보스턴에서 열린 2022 MRS(Material Research Society) Fall Meeting에서 5편의 구두 발표와 4편의 포스터 발표에 선정된 것이다. 특히 나노과학기술융합학과 전자공학전공 석사과정 김성재, 김소미 원생은 최우수 포스터상을 수상하며 의미를 더했다. 또한, 나노과학기술융합학과 전자공학전공 석사과정 신지현 원생은 제주도에서 열린 국제학회 제7회 ENGE(The International Conference on Electronic Materials and Nanotechnology for Green Environment)에서 최우수 구두 발표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박사과정 서주형 학생은 두 개의 포스터 논문으로 최우수 포스터상을 수상했다. 한 사람이 국제학회에서 동시에 두 개의 상을 받은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서주형 학생은 캐나다 앨버타대학 방문연구원으로 파견하여 국제공동연구를 수행 중이다. 유 교수 또한 가천대학교에서 2021, 4분기 ‘연구자상’ 및 총장 특별 장려금을 수상한 바 있다.
“혼자서 연구를 하고자 했다면 결코 교수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학생들을 성장시키는 것이야말로 저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저라는 한 사람의 수상과 성취들도 물론 감사하지만 제가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이 인정을 받고 수상하는 모습에서 큰 보람과 기쁨을 얻고 있습니다. 학생들이 학부 시절에는 상상도 하지 못하던 연구적 성과를 탄생시키고, 성장해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과 이러한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연구실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원동력이죠.”
유 교수는 세계 최고 수준의 반도체연구를 하는 연구실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전했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노력’이다. 그는 전 세계의 수많은 연구자보다 뛰어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남들이 놀거나 쉬고 있을 때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단언했다. 끊임없는 노력을 경주하는 과정에서 함께 달려가는 동료의 존재는 무엇보다 소중하다. 이를 통해 자신의 한계를 다시금 극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까닭이다. 유 교수는 좋은 연구 성과를 창출한 성취감을 심어주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노력을 통해 성취를 얻고, 이로써 얼마나 성장했는지 체감하는 일련의 과정이야말로 스스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힘이라는 확신에서다. 학생과 교수는 운명공동체라 말하는 유 교수는 쉼 없는 노력을 통해 성취를 이루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학생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서로의 성장을 이끌며 새로움을 찾아 나서는 유 교수 연구팀이 발견할 새로운 대륙의 모습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