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인물 유지연 기자] 세포와 같은 생체 재료를 활용한 ‘바이오 잉크’를 원료로 삼아 3D 프린팅으로 인공장기를 구현해내는 ‘3D 바이오 프린팅’ 기술은 인체의 기능 복원과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 인체의 세포를 배양해서 인쇄하기에 부작용이나 면역 거부 반응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전남대학교 융합바이오시스템기계공학과 이희경 교수는 최근 인간의 관상동맥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며 주목받았다. 3D 바이오 프린팅 기술로 제작한 심혈관 질병 모델은 심혈관 치료법 연구에도 상당한 진전을 가져오리라 기대된다.
체외에서 인간의 관상동맥 구조와 기능을 모사하는 혁신적 기술 개발
전남대학교 이희경 교수 연구팀이 한국재료연구원 최영진 박사와 함께 바이오프린팅으로 인간의 관상동맥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높은 생체친화성을 자랑하나 기계적 강도가 약한 하이드로젤을 이용해 인간 심혈관 크기의 관형 구조물 제작에 성공한 것이다. 이는 동축 노즐 기반 바이오프린팅 기술을 이용해 체외에서 인간의 관상동맥 구조와 기능을 모사할 수 있는 혁신적인 기술이다.
이번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우수신진연구자지원사업, 심혈관 환자맞춤형 차세대 정밀의료기술 선도연구센터(지역혁신 선도연구센터, RLRC), 바이오의료기술개발사업, STEAM(미래유망융합기술파이오니어)사업, 4단계 BK21+IT-Bio융합시스템농업교육연구단과 한국산업기술기획평가원의 산업기술알키미스트프로젝트, 바이오산업핵심기술개발사업 및 농림식품기술기획평가원의 디지털농업 전문인력양성사업의 지원으로 수행되었으며, 연구 논문은 생체재료분야 국제학술지 ‘Journal of Materials Chemisty B’ 9월호 표지에 선정되었다.
제작된 인간 관상동맥 체외모델은 실제 심혈관과 유사한 기능과 구조를 기반으로 차세대 스텐트 개발 등 의학적 발전에 기여할 것이라 기대된다. 이 교수는 심혈관 질환의 치료뿐 아니라 식물의 물관, 체관 등 각종 관형 구조를 가진 생체 시스템을 모사해 농생명/농식품 분야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바이오프린팅 연구의 궁극적 목표는 인공장기의 이식 혹은 새로운 신약이나 치료방법을 실험할 수 있는 질병 모델 개발에 있습니다. 우리 몸에 혈관이 없는 기관이 거의 없기에 혈관화되어 있는 장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조직공학자들이 추구하는 과학적 목표 중 하나죠. 우리 생체제조시스템연구실 또한 혈관화된 질병 모델 개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 교수는 여러 심혈관 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치료방법 연구의 기반이 될 수 있는 혈관화된 심장 근육(심근)을 만들기 위한 공동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전남대 심혈관 환자맞춤형 차세대 정밀의료기술 선도연구센터, 전남대병원 마이하트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두 연구그룹과의 공동연구는 그가 심혈관 질병 모델이라는 연구주제를 설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교수는 현재 관상동맥 모델과 심근경색 모델제작을 연구하고 있다. 두 모델이 연계된다면 동맥경화부터 심근경색 발병에 이르는 전 과정을 모사할 수 있는 심혈관 질환 모델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심근경색은 심장을 감싸고 있는 혈관에 동맥혈류 공급이 중단되면서 발생합니다. 주변의 심근세포 기능이 저해되며 심박이 어려워지고, 심부전이 생기게 되죠. 우선 국소적으로 혈류가 끊겨 심근세포가 기능을 못 하는 상태를 재현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단계는 혈류가 막힌 후 스텐트 이식 등으로 이를 복원했을 때 발생하는 이차적인 질병의 발병을 모사하고자 합니다.”
바이오프린팅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한 연구, 한 사람의 연구자를 키워낸 두 교수
학부에 입학할 즈음 이희경 교수가 우연히 봤던 한 편의 다큐멘터리는 그의 연구주제가 되었다. 미래에는 사람의 장기를 프린팅 기술로 인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다큐멘터리였다. 이 교수는 어린 마음에 저렇게 멋진 일을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과 흥미를 품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후 학부 지도교수였던 한국산업기술대학교 윤원수 교수와의 진로 상담에서 바이오와 기계공학을 융합한 분야를 연구하고 싶다고 말한 그에게는 또 하나의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다. 윤 교수가 이 교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인 포항공대 조동우 교수의 제자였던 것이다.
“당시 윤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스승이 바이오프린팅 연구를 계획하고 있다며, 당신과 함께 공부하며 준비할 것을 권해주셨습니다. 그냥 흘려버릴 수도 있는 제자의 호기심을 알아봐 주시고, 기회까지 제공해주신 거죠. 제게는 특별하고도 소중한 기억입니다.”
프린팅을 통해 사람의 장기를 인쇄한다는 컨셉이 주목받던 2009년은 조 교수 역시 전통적인 기계공학에 바이오 분야를 접목하고자 관련 연구실을 꾸리고 관련 연구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당시 대학교 2학년이던 이 교수는 학부 연구 참여 활동을 통해 바이오프린팅을 활용한 연구 분야인 조직공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1980년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에서 화상 환자를 위한 인공 피부를 제작하면서 새로운 학문 분야로 인정받기 시작한 조직공학은 생명과학·의학·공학의 기본개념과 기술을 바탕으로 생체조직의 대용품을 만들어 이식함으로써 생체 기능의 유지·향상·복원을 가능케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다.
“우연히 관련 분야에 몸을 담게 되었지만, 오히려 제게는 좋은 계기가 되었습니다. 순수한 호기심을 좇아 연구해나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어요. 환경적으로도 제게 큰 행운이었습니다.”
한국의 3D 바이오프린팅 기술 발전 위한 다양성 필요해
전 세계적으로 바이오프린팅에 대한 관심이 커지던 시기 우리나라는 임상 적용 측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작년 8월 가톨릭대학교 김성원 교수 연구팀의 주도로 윤원수 교수가 대표로 있는 티앤알바이오팹과 조동우 교수가 참여해, 세계 최초로 동종 성체줄기세포 기반의 3D 바이오프린팅 방식으로 인공 기관(trachea)을 환자에게 이식한 것이다. 이전까지 기관은 복잡하고 위험한 수술 과정과 완벽한 복원이 어려워 난치성 질환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이희경 교수는 인공장기의 임상적 적용을 위해 정부가 힘을 모아 관련 프로세스를 처리한 결과 해외에 비해 빠르게 성과를 낼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빠른 속도와 별개로 개선해야 할 부분도 있다. 바이오프린팅을 위한 소재개발 문제이다. 바이오프린팅 분야는 특성상 다학제 간 융합이 요구된다. 의학적 정보부터 질병과 장기에 대한 이해, 생물학적 이해를 비롯해 재료공학과 기계공학적 지식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최근에는 AI 기술을 활용해 인공장기를 무인화해 생산하는 개념 등 새로운 상상력이 더해지고 있다. 이 교수는 국내 재료공학계에서도 분야를 리딩하는 연구자들이 많지만 아직까지는 바이오프린팅을 타겟팅한 소재개발에는 더 많은 연구자들의 참여가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해외의 경우 바이오프린팅에 접목할 수 있는 새로운 소재들이 유력 저널에 지속해서 소개되고 있는 만큼 해당 분야에 관심을 갖는 연구자들이 등장한다면 우리나라 바이오프린팅 연구만의 의미 있는 성과를 도출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이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연구과제들이 실용화 혹은 임상 적용에 초점을 맞추고 설계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빠른 임상 적용이 가능했죠. 하지만 이는 새로운 시도를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미 효과와 성능이 검증된 방법을 약간 변형해 적용하는 방식을 택하는 경우가 많죠. 이러한 방식도 물론 훌륭하지만 보다 병렬적으로 과학적 시도의 다양성을 인정해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된다면 우리나라의 인프라와 기술력이 더 큰 시너지를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생체제조시스템연구실만의 기술 노하우 확보하며 환자들의 고통 더는 데 기여할 것
이희경 교수는 공배양이 가능한 시스템 구축에 집중하고 있다. 서로 다른 종류의 조직이 한 장소에서 같이 자라도록 함으로써 각자 자기 기능을 하면서도 각기 다른 기능이 조화되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는 공배양을 가능케 할 기술적 해법을 찾아낸다면 다른 장기로의 응용도 가능해질 것이라 내다봤다. 혈관화된 다른 장기들은 혈관을 통해 치료 약물이 투입되었을 때 여러 약물의 대사과정을 모사할 수 있는 모델로 기능할 수 있다.
올해는 작은 혈관과 조직을 공배양하는 노하우 구축에 무게를 싣고 있다. 관상동맥 등 큰 혈관과 다른 조직을 연결하기 위해 작은 혈관들을 연결하는 중간 단계를 완성하는 것이 목표다. 이와 관련해 항암이나 난치병 연구자들의 러브콜이 이어지기도 한다. 이 교수는 혈관과 근육 조직을 넘어 신경을 추가로 연결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다며, 신경화된 근육 개발에 성공한다면 신경과 근육 간 상호작용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퇴행성 질환 분야의 치료법 연구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전했다. 내년에는 신경과 조직을 연결하는 기술을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설정했다. 이러한 연구의 진전을 통해 생체제조시스템연구실만의 기술을 구축하고자 한다는 설명이다.
“조직공학은 한 가지 학문에 대한 지식만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분야입니다. 그렇기에 제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연구실 설립 4년 차에 접어든 지금은 연구원들의 역량 또한 조금씩 다져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생체제조시스템연구실만의 고유한 기술로 성과들을 만들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이 교수 연구실에는 방글라데시나 파키스탄, 인도 등 다양한 국가 등에서 온 유학생들이 연구에 참여하고 있다. 국가적으로도 의료, 보건, 생명공학 분야를 공부한 후 본국에 돌아와 기술을 전수하길 장려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유학생들은 생체제조시스템연구실의 논문과 연구주제를 보고 해당 분야에 도전하곤 한다. 이러한 환경은 이 교수의 교육관에도 영향을 주었다. 임용 초기만 해도 자신의 단순한 호기심을 이끌어내어 연구자로 성장시켜주었던 은사님을 롤모델 삼아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는 교수를 꿈꾸었으나 이제는 제자들이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실질적 솔루션을 마련하는 교수상을 그리는 그다. 외국인 학생들 역시 본국으로 돌아갔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진로를 염두에 두고 지도하고 있다. 이 교수는 유학생들이 한국을 택하고 생체제조시스템연구실로 방향을 결정하기까지 큰 결심과 더불어 숱한 어려움을 극복해왔다며, 이러한 선택과 도전에 대한 고마움을 바탕으로 그들의 선택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고 말했다.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은 학부 시절 저를 이끌어주신 윤원수 교수님과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도하셨던 조동우 교수님의 덕분입니다. 그 과정을 지지해준 가족들과 전남대학교 교수님들께도 감사하죠. 모든 분들의 도움으로 제가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었듯 저 역시 후배 연구자들을 배출하는 동시에 연구자로서의 성장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